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월 항쟁 (문단 편집) === 5월 이전 === 1986년 [[인천 5.3 운동]]과 [[10.28 건국대학교 항쟁|10.28 건대항쟁]]의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치니 억]]' 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1961)|박종운]][* 이름이 비슷하지만 직계 가족은 아니다.]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059589|중앙일보, 경찰조사 받던 서울大生 숨져, 1987년 1월 16일]] ]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이와 관련된 [[고바우 영감]] 만화 일화가 있다. 당시 정부에서 "박종철 군에게 아무런 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쇼크사했다."라고 발표하자 고바우 영감이 "그럼 왜 온 몸이 멍투성이였소?"라는 질문에 "[[읍니다|아뭏든]](아무튼) 쇼크사했다."라고 반복하자. 갑자기 고바우 영감이 "억!"하고 안색이 파래지더니 "내 심장도 이상해진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원고로 냈는데 이게 정부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고바우 영감이 한 질문 중 "왜 온 몸이 멍투성이었느냐"란 대목이 걸렸던 것. 결국 신문에는 "그럼 왜…?"라는 것으로 대신 실린다.[[https://100image.chosun.com/cs-digitizing-images/1987/01/19870117/Image/news-cs-20242-19870117-m-1-11-300-b1-bw-thumb-1100.jpg|#]] ][* 가장 의구심이 강했던 사망 원인에 대한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정치적인 어떠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동아일보]]는 親 [[김대중]] 신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색이 강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6대 중앙일간지 중에서 비교적 야당 쪽에도 지면을 할애해서 유연하게 써주는 정도였지 지금의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이 확실한 진보언론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정권의 탄압대상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1988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1967년)|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 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1915)|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바지사장]]으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